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왕충은 평생 자기 책장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기원후 1세기, 후한의 수도 낙양에는 태학이라는 국립대학이 있었어요.
지방 출신 가난한 학자 왕충(27~100년경)은 그곳에서 공부할 때 책 한 권 살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는 매일 시장 책방 앞에 서서 한 번 본 글을 통째로 외우고 떠났어요.
오늘날로 치면, 도서관 회원증도 없이 교보문고 매대 앞에 서서 두꺼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그냥 나오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가난이 오히려 반전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머릿속에만 쌓은 지식으로, 왕충은 결국 30만 자짜리 책을 썼어요.
『논형(論衡)』이라는 책인데, 이름 뜻이 "저울에 단 의견"이에요.
시장 서가에서 외운 글들이, 당시 가장 도발적인 비판서로 세상에 나왔어요.
『후한서』가 이 이야기를 기록해놨으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에요.

왕충은 공자가 틀렸다고 생각하면 그렇다고 적었어요.
『논형』 안에는 「문공(問孔)」과 「자맹(刺孟)」이라는 장이 있어요.
각각 "공자에게 묻는다"와 "맹자를 찌른다"는 뜻이에요.
왕충은 여기서 공자와 맹자의 말 중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을 항목별로 뽑아 하나하나 따졌어요.
회사 신입사원이 창립자 어록집을 들고 와서 "23쪽 발언이 47쪽 발언과 모순됩니다"라고 짚는 것처럼요.
그런데 그게 왜 충격적이냐면, 당시 후한은 한 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정한 지 이미 200년이 지난 시대였기 때문이에요.
한 무제는 기원전 2세기 황제로, 공자의 가르침을 나라의 공식 이념으로 채택한 인물이에요.
그 200년이 흐르는 동안 공자는 성인, 즉 완벽하고 신성한 존재로 굳어져 있었어요.
공자에게 따진다는 건 종교개혁 이전 유럽에서 교황에게 반기를 드는 것과 같은 일이었어요.
그런데 왕충은 했어요.
그것도 책 한 권 분량으로.

왕충은 가뭄이 황제 탓이 아니라고 적은, 후한 시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당시 한나라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던 이론이 있었어요.
천인감응(天人感應)이라는 거예요.
하늘과 사람의 행동이 서로 반응한다는 뜻인데, 기원전 2세기 유학자 동중서가 체계화한 이론이에요.
쉽게 말하면, 황제가 나쁜 정치를 하면 하늘이 가뭄이나 지진으로 경고를 보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뭄이 들면 황제가 직접 조서를 내려 자기 잘못을 반성해야 했어요.
이게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한나라의 국가 공식 운영 체계였어요.
왕충은 이걸 정면으로 부정했어요.
"하늘은 사람의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적었어요.
모두가 별자리 운세로 회의 일정을 잡는 회사에서 혼자 "별자리는 그냥 우연이에요"라고 보고서를 올리는 직원 같은 거예요.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왕충은 『논형』의 「논사(論死)」, 즉 "죽음을 논하다"라는 장에서 귀신도 없다고 못 박았어요.
"사람이 죽으면 그저 흙으로 돌아갈 뿐"이라고요.
조상 제사가 일상이고 귀신 이야기가 당연하던 사회에서, 이건 철학적 주장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도전이었어요.

왕충이 죽은 지 한참 지나서야, 그의 책은 후한 최고 지식인의 책상 서랍에서 다시 꺼내졌어요.
왕충은 살아 있는 동안 군의 하급 관리 자리만 떠돌다가 무명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논형』은 한동안 그의 고향인 회계 지방에 묻혀 있었어요.
그러다 후한 말의 대학자 채옹(蔡邕, 132~192년경)이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어요.
채옹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그가 높이 평가한 책이라면 학계 전체가 주목하던 인물이에요.
그런데 채옹은 이 책을 발견하고 나서,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휘장 뒤에 숨겨두고 혼자만 읽었다고 전해져요.
무명 작가가 자비출판한 책을, 100년 뒤 노벨상 수상자가 자기 서랍에 잠가두고 혼자만 꺼내보는 장면이에요.
시장 책방 앞에서 남의 책을 외워 읽던 그 사람이 쓴 책이, 결국 당대 최고 지성이 독점하고 싶었던 비밀 텍스트가 됐어요.
왕충은 평생 자기 책장 하나 갖지 못했는데, 죽고 나서야 다른 사람의 책장에서 가장 소중한 자리를 차지했어요.
그가 끝내 알지 못했을 그 사실이, 왠지 가장 왕충다운 결말처럼 느껴져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2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