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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859년 요코하마의 한 거리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기가 5년간 공부한 언어가 이미 죽은 언어라는 사실을 알아챘어요.
그가 마주친 건 간판들이었어요.
막 개항한 요코하마, 일본 최초로 외국인 거류지가 생긴 항구 도시의 상점 간판은 하나도 빠짐없이 영어였어요.
문제는 그가 5년간 목숨처럼 매달린 언어가 네덜란드어였다는 거예요.
5년간 토익 990점을 만들어 놨는데 면접장에서 "여기는 이제 전부 중국어로만 일합니다"라는 말을 들은 느낌, 아시겠어요?
후쿠자와는 당시 일본 서양학의 1세대 엘리트였고, 네덜란드어는 그의 가장 큰 자산이었어요.
그런데 그날 그는 집으로 돌아와 네덜란드어 사전을 덮고, 영어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하루 만에 5년을 버린 결정이었어요.
그 속에 이 사람의 본질이 있어요.
일본 근대화의 첫 페이지는, 19살 청년이 형의 한학 책을 덮고 떠난 날부터 시작됐어요.
사실 이런 결단은 이 사람에겐 처음이 아니었어요.
후쿠자와는 1835년 규슈의 나카쓰번, 지방 영주 아래 있던 작은 행정 구역의 하급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그가 한 살 때 세상을 떠났고, 집안을 이어받은 형은 한학자였어요.
한학이란 중국 고전을 공부하는 학문으로, 당시 일본 지식인의 기본 교양이자 출세의 사다리였어요.
형은 동생에게도 사서삼경을 권했어요.
사서삼경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이 담긴 유교의 핵심 경전들이에요.
한마디로 그 시대 지식인이 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었어요.
하지만 19살의 후쿠자와는 1854년 형의 말을 거스르고 나가사키로 떠났어요.
가업을 이으라는 집에 "저는 코딩 부트캠프 갑니다"라며 나간 청년의 결단, 그게 훗날 일본 만 엔권 지폐의 얼굴이 될 사람의 첫 행보였어요.
배우러 간 건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과 포술이었어요.
그리고 5년 뒤, 그 네덜란드어마저 버렸어요.
한 줄짜리 문장이, 일본인 열 명 중 한 명을 그의 독자로 만들었어요.
1872년 후쿠자와는 《학문의 권유》(学問のすすめ) 첫 편을 펴냈어요.
그 첫 줄은 이랬어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17편짜리 시리즈는 1880년까지 약 340만 부가 팔렸어요.
당시 일본 인구가 3500만 명이었으니, 국민 열 명 중 한 명이 직접 사서 읽은 거예요.
인터넷이 막 보급되던 2000년대 초, 한국에서 모두가 같은 자기계발서를 들고 다니던 그 풍경이랑 비슷해요.
그런데 이 책이 나온 시점이 묘해요.
신분제가 공식 폐지된 게 불과 4년 전이었어요.
사무라이, 농민, 상인, 천민으로 나뉘던 수백 년간의 계급이 법적으로 사라진 직후, 사무라이 출신인 후쿠자와가 "사람은 평등하다"고 외친 거예요.
그 말이 얼마나 파격이었는지는 팔린 권수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오늘날로 치면, 단행본 한 권이 대한민국 인구의 10분의 1을 독자로 거느린 셈이에요.
결국 그 한 줄이 나라 전체를 움직였어요.
1885년 봄, 평등을 외쳤던 그 펜이 아시아를 버리자고 적었어요.
후쿠자와가 직접 창간한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 1885년 3월 16일 자에 사설 하나가 실렸어요.
제목은 탈아론(脱亜論), 뜻은 "아시아에서 벗어나자"예요.
익명으로 실렸지만, 후쿠자와의 글임은 당시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어요.
내용의 핵심은 이거였어요.
일본의 이웃인 청나라와 조선은 '나쁜 친구'이니 절교해야 하고, 서구 열강이 아시아를 다루는 방식 그대로 그들을 다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서양 편"이라는 선언이었어요.
그 안에는 "이웃은 식민화해도 된다"는 논리가 숨어 있었어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쓴 그 사람이, 13년 뒤에는 이웃 민족을 야만으로 분류하고 있었어요.
인권 운동가가 SNS에서 매일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 외치다가, 옆 동네 사람들에 대해서는 "걔네는 우리랑 다른 종족이야"라고 올리는 모순과 비슷해요.
그렇다면 후쿠자와가 말한 평등은, 처음부터 경계가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세상이 바뀌면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그 능력이, 이번에는 신념에도 적용된 걸까요.
《학문의 권유》 첫 줄을 다시 읽으면, 그 문장이 조금 다르게 들려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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