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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602년 봄, 76세의 이지는 사형도 유배도 아닌 제3의 출구를 스스로 골랐어요.
북경 감옥에서 이지는 이발사를 불러달라고 청했습니다.
면도하던 칼을 건네받은 순간, 그는 그것으로 자기 목을 그었어요.
그런데 반전이 있어요.
그날 옥리들이 검토 중이던 처분은 사형이 아니라 고향으로 쫓아보내는 유배였습니다.
즉, 그는 살 수 있었어요.
이틀을 더 버티다 사망했지만, 그 결정은 자신이 내렸습니다.
그 직전 이지가 적어둔 말이 하나 있어요. "七十老翁何所求", 우리말로 옮기면 "일흔 살 노인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입니다.
회사가 권고사직 통보서를 꺼내기도 전에 본인이 먼저 사직서를 내밀고 회의실 문을 닫고 나온 사람처럼, 이지는 자기 끝을 남에게 맡기지 않았어요.
관복을 벗던 날, 이지는 머리를 밀었지만 수염은 남겼습니다.
이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이해하려면 그 시대를 잠깐 봐야 해요.
명나라에서 머리를 민다는 건 불교 승려가 된다는 뜻이었고, 머리를 기른다는 건 유학자로 산다는 뜻이었어요.
이지는 26세에 향시에 합격해 25년 동안 관료로 일했어요.
향시는 오늘날로 치면 국가고시 같은 것으로, 합격하면 관직에 나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운남성 요안부의 지방장관 격인 지부지사까지 올랐으니 꽤 출세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1580년, 54세에 모든 걸 내려놓고 호북성 마성의 사찰 지불원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머리를 밀었어요.
하지만 수염은 자르지 않았어요.
출가한 승려도 아니고, 머리를 기른 유생도 아닌 묘한 모습으로 세상 앞에 선 거예요.
정장 셔츠에 운동화를 신고 출근한 임원이 "이게 내 답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이지는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외모로 표현했습니다.
성리학의 엄격한 도덕 체계를 떠나면서도 불교에 발을 담그지 않은, 일부러 만든 애매한 정체성이었어요.
이지는 자기 책의 운명을 출판 전에 미리 제목으로 박아넣었습니다.
1590년 그가 펴낸 평론집의 이름은 분서(焚書), 직역하면 "태워야 할 책"이에요.
또 다른 역사 평론집엔 장서(藏書), 즉 "숨겨둬야 할 책"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책들 안에서 이지가 한 말은 당시로선 폭탄이었어요.
그는 "공자의 시비(是非)를 따르는 것이 곧 시비가 되어버렸다"고 적었습니다.
공자는 동아시아에서 수천 년 동안 절대적 권위였는데, 이지는 그 권위 자체를 의심의 대상으로 끌어내린 거예요.
더 나아가 이지는 동심설(童心說)을 주장했어요.
어린아이의 거짓 없는 마음이 가장 참된 것이라는 주장인데, 쉽게 말하면 "어른이 될수록 진심과 멀어진다"는 거예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성도 사내처럼 견식이 있다고 적었고, 이익을 좇는 상인을 정당화하기까지 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표지에 "이 책은 곧 절판될 예정입니다"라고 인쇄해 출간한 것처럼, 이지는 결말을 알면서도 출판했어요.
그리고 실제로 1602년, 황제의 명령으로 그의 책은 불태워졌습니다.
자기 예언을 제목으로 적어두었고, 그 예언은 정확히 맞아떨어졌어요.
이지가 자결한 그해 그의 책은 황제 명령으로 불탔지만, 인쇄소들은 더 바빠졌습니다.
탄핵은 예부의 감찰관 장문달이 올렸어요.
예부는 오늘날로 치면 교육부와 문화부를 합친 것 같은 관청인데, 거기 소속 감찰관이 이지를 "감히 어지러운 도를 외쳐 세상을 미혹한다"며 고발한 거예요.
만력제는 체포와 분서를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책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분서는 명나라 말기 내내 필사되고 재간행되었습니다.
양명학 좌파와 공안파 문인들, 즉 기성 질서에 저항하던 문인 그룹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끼쳤어요.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분서는 다섯 차례나 더 금서로 지정되었습니다.
다섯 번 금서 지정이란 곧 다섯 번 살아났다는 뜻이에요.
그의 사상은 청대 사상가 황종희에게 흘러갔고, 나중엔 일본 유학자들에게까지 닿았습니다.
금지된 책일수록 더 비싼 값에 거래되는 오늘날의 절판 마니아 시장과 같았어요.
이지는 죽었지만 그의 말은 황제의 불꽃보다 오래 살아남았고, "더 바랄 게 없다"던 76세 노인이 찍은 마침표는 역사에겐 쉼표가 됐습니다.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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