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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진상은 유학의 정통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어요.
그런 그가 어느 날 스승의 학문을 통째로 내려놓고 삼베 짜는 농부에게 절을 올렸어요.
오늘날로 치면, 명문대 교수 밑에서 수학한 제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내고 시골 텃밭에서 채소 키우는 사람 밑으로 들어간 거예요.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 농부의 이름은 허행(許行)이에요.
전국시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에 초나라에서 등나라로 이주한 사람이에요.
등나라는 지금의 산둥성 일대에 있던 아주 작은 나라였는데, 허행은 수십 명의 무리와 함께 삼베를 짜고 짚신을 엮어 생계를 꾸리면서 자신의 사상을 펼쳤어요.
진상이 버린 스승 진량(陳良)은 당시 유학계에서 손꼽히는 학자였어요.
유학은 공자의 가르침을 잇는 학문으로, 당시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따르던 정통 사상이에요.
그 정통 사상의 제자가 밭 갈고 짚신 짜는 사람에게 전향했다는 건, 허행의 사상이 단순한 농민 운동이 아니라 엘리트 지식인까지 흔든 철학이었다는 증거예요.
이 사실이 남아있는 곳은 《맹자》 등문공 편이에요.
전국시대 여러 사상이 충돌하던 시대를 기록한 책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이미 이상한 점이 하나 있어요. 허행은 도대체 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까요?

허행이 등나라에서 펼친 주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돼요. "왕이여, 호미를 들어라."
그의 핵심 주장은 '현자도 백성과 함께 밭을 갈고(與民並耕), 직접 밥을 지어 먹으면서 다스려야 한다(饔飧而治)'는 거였어요.
직접 일하지 않으면 다스릴 자격이 없다는 말이에요.
군주가 곡식 창고에서 세금을 걷어 먹는 체제 자체를 착취로 규정한 거예요.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이 직접 요리하고 빨래를 하면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고 누군가 진지하게 주장하는 상황이에요.
그 주장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지는 상상이 가시죠.
그런데 진상 같은 엘리트는 그 주장에 설득돼버린 거예요.
당시는 왕의 혈통 자체가 하늘의 뜻이라는 사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예요.
그 시대에 "왕인 이유가 혈통이 아니라 노동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건 거의 상상 불가능한 평등 선언이었어요.
허행은 분업 자체를 문제로 봤어요.
어떤 사람은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몸을 쓰는 구조, 그 구조 속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몸 쓰는 사람 위에 군림하는 체제를 정면으로 거부한 거예요.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너희가 만든 것을 쓴다"는 논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어요.

허행의 글은 단 한 줄도 남아있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의 사상을 꽤 구체적으로 알아요.
그를 논파하려 했던 맹자(孟子)가 너무 성실하게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에요.
맹자는 진상을 통해 허행의 주장을 전해 듣고 격렬히 반박했어요.
그의 반론은 이거예요. "어떤 사람은 마음을 쓰고, 어떤 사람은 힘을 써요(或勞心 或勞力). 마음 쓰는 사람이 힘 쓰는 사람을 다스리고, 힘 쓰는 사람이 마음 쓰는 사람을 먹여 살리는 거예요."
그리고 맹자는 허행에게 날카로운 질문 하나를 던져요.
"허행은 직접 솥을 만들어 써요? 쟁기도 직접 제련해요?"
진상이 아니라고 하자 맹자는 바로 받아쳤어요. "그럼 곡식으로 그걸 사 쓰는 거잖아요. 분업을 쓰면서 분업을 비판하는 건 모순 아닌가요?"
논리적으로는 맹자가 이겼어요.
하지만 진짜 아이러니는 여기서 시작돼요. 맹자가 허행을 반박하기 위해 쓴 그 글이, 허행을 역사에 남긴 유일한 기록이 됐다는 거예요.
그를 완전히 지워버리려 했는데, 성실하게 비판할수록 오히려 그가 불멸이 된 셈이에요.
그가 직접 남긴 글은 없어요.
그의 학파가 남긴 기록도 없어요.
오직 적의 책에만 그의 목소리가 남았어요.

허행의 학파는 사라졌어요.
그러나 그의 질문은 살아남았어요.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면서 허행의 농가(農家) 사상은 학파로서 소멸했어요.
농가는 농업을 중심에 두고 지배층의 특권을 부정한 사상 흐름이에요.
하지만 그가 던진 질문은 형태를 바꿔가며 역사 속에서 계속 다시 등장했어요.
19세기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직접 농촌 공동체를 세우고 귀족 생활을 버렸어요.
20세기 중국의 마오쩌둥은 지식인과 관료를 농촌으로 보내 직접 노동하게 하는 하방(下放) 운동을 벌였어요.
"노동하지 않는 자가 노동하는 자 위에 군림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은 시대마다 다른 이름으로 반복됐어요.
맹자가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한 논리는 패배했어요.
분업은 살아남았고, 지금도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과 몸 쓰는 사람이 완전히 다른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회에 있어요.
현장을 한 번도 밟지 않은 임원이 현장직 구조조정을 결정하는 장면은, 2,300년 전 맹자가 허행에게 이겼던 그 논리 위에 서 있는 거예요.
허행이 틀렸을 수도 있어요.
분업 없이 현대 사회가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의 질문 하나는 여전히 한 번도 제대로 답해진 적이 없어요. 노동하지 않는 사람이 노동하는 사람 위에 군림할 자격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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